1945년 9월 7일,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와 제2호
미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자 태평양미육군최고지휘관으로서 북위38도선 이남의 한반도와 일본을 점령했다. 이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에 근거한 것으로, 남한 점령에 앞서 1945년 9월 7일 포고 제1호를 발포하여 군정 설립과 점령 조건을 천명했다.
포고 제1호는 “오랜 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조항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及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조선인은 인식할 줄로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이라고 하여 점령의 목적이 조선 독립에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제1조에서 “조선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서 실행함.”이라고 하여 군정(軍政)에 의한 직접 통치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는 미군 점령 이전부터 전국적인 조직으로 자리 잡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이후의 인민위원회, 정부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중경임시정부 등 한국인의 자치 역량을 인정하지 않는 조치였다.
또한 제2조에서는 “정부 공공단체 또는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과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과 고용인은 有給無給을 불문하고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別命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모든 기록과 재산의 보관에 任할 사.”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료 및 경찰들을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존 업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현상유지 정책’으로 임시적이고 행정편의주의적인 조치였지만 한국의 탈(脫)식민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함께 같은 날 공포된 포고 제2호는 ‘범죄 또는 법규 위반’에 관한 것으로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 하에 發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軍律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의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他 형벌에 처함”이라고 하여 해방의 공간에 점령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천명했다.
맥아더 사령부 휘하의 하지(John R. Hodge) 중장과 그의 미 육군 제24군단(24th Coprs)이 상급 부대인 제10군(10th Army)과 함께 남조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1945년 8월 11일 저녁이었다. 이 명령을 받았을 때 제24군단은 오키나와에서 1945년 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하지의 제24군단은 9월 8일이 되어서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아침나절 하지 일행을 실은 선단이 인천항에 도착했고, 오후 1시경부터 미군 비행기의 호위 속에 살벌한 분위기에서 상륙이 시작되었다. 부둣가에는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으나 일본 경찰의 제지로 환영 행사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살해되고 여러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하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면서 이미 무전으로 일본군에게 부두의 치안 유지를 일임한 바 있었다. 상륙을 전후해서 하지는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와 제2호를 수차례 공중 살포했다. 한국인들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지만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이 자신의 손 안에 있다’,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포고 제1호와 2호에는 그러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배려한 흔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