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어 198명의 제헌국회 의원이 선출되었다. 제헌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데 필요한 헌법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31일 첫 회의를 개최하고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곧이어 헌법기초위원(憲法起草委員)을 선정하기로 하였는데, 6월 2일 국회의원 중 30인이 헌법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헌법기초위원은 유성갑(柳聖甲), 김옥주(金沃周), 김준연(金俊淵), 오석주(吳錫柱), 윤석구(尹錫龜), 신현돈(申鉉燉), 백관수(白寬洙), 오용국(吳龍國), 최규옥(崔圭鈺), 김광준(金光俊, 金命仁으로 표시된 자료도 있는데 동일인으로 추정됨), 이종린(李鍾麟), 이훈구(李勳求), 유홍렬(柳鴻烈), 연병호(延秉昊), 서상일(徐相日), 조헌영(趙憲泳), 김익기(金翼基), 정도영(鄭島榮), 김상덕(金尙德), 이강우(李康雨), 허정(許政), 구중회(具中會), 박해극(朴海克), 김효석(金孝錫), 김병회(金秉會), 홍익표(洪翼杓), 서성달(徐成達), 조봉암(曺奉岩), 이윤영(李允榮), 이청천(李靑天)으로 모두 30인이었다. 이를 정파별로 보면, 한국민주당 소속이 7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이 5명, 무소속이 13명, 조선민주당, 민족통일본국국부, 대동청년당, 단민당, 기타가 각 1명이었다.
註01
헌법기초위원은 국회의원들 중에 선출되었고 모두가 헌법 제정에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헌법기초위원회(위원장: 서상일)는 6월 2일 헌법안을 작성하는 실무작업을 도와 줄 전문위원 10인을 위촉하였다. 전문위원은 유진오 고려대 교수, 권승렬 사법부 법제차장, 고병국 변호사, 임문환 미군정청 중앙경제위원회 위원, 한근조 변호사(전 사법부 법제차장), 노진설 국회선거위원회 위원장, 노용호 국회선거위원회 사무국장, 차윤홍 국회선거위원회 사무국장, 김용근 국회선거위원회 사무국장, 윤길중 국회선거위원회 사무국장이었다. 이들 전문위원은 이전부터 입법의원의 법제사무를 담당해오던 사람들과 법조계 전문가, 법학 전공자, 법전기초위원회 분과위원 등의 인사들로 정해졌다. 전문위원들은 먼저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작업을 하였다.
註02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3일부터 바로 회의를 시작하였다. 당시 국회에는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가 공동으로 작성한 헌법안, 민주의원안, 조선임시약헌, 대한민국임시헌법 등이 자료로 제출되어 있었는데, 기초위원들은 헌법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 즉, 헌법의 원칙, 새 국가의 국호, 정부형태, 국회를 단원제로 할 것인가 양원제로 할 것인가 하는 국회의 구성 방법 등에 대하여 격론을 벌이면서 토론을 하였다. 다음 날에는 회의에 제출된 많은 자료를 놓고 중구난방으로 논의할 수는 없었기에 전문위원들이 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할 안을 먼저 만드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 여기서는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이 가장 유력한 안으로 논의되었는데, 전문위원인 권승렬이 이 날 새로운 안을 제출하고 이 모두를 놓고 다시 논의하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6월 5일부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안기초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유진오·행정연구위원회 공동안’을 원안으로 하고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헌법안을 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헌법기초위원회는 1948년 6월 3일부터 22일까지 모두 16회에 걸쳐 회의를 열어 헌법안의 기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특히 헌법기초위원회의 논의 초기에는 새로운 헌법의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 형태로 논의하다가,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이 출석하여 대통령제를 강력히 주장한 후 대폭 수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헌법기초위원회는 3번이나 기한을 연장하면서 최종적으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할 헌법안을 마련하였다. 헌법안은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작성을 완료한 다음날인 6월 23일 제17차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대한민국헌법안은 국회 속기록에 수록되어 있다. 본회의에서는 조헌영 의원의 헌법안 낭독, 서상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의 경과 및 논쟁점 설명, 유진오 전문위원의 헌법의 기본정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헌법안 심의는 통상의 회의 방식대로 3독회의 방식을 취하였다. 제1독회는 헌법안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기본적인 사안에 대하여 논의하는 대체토론을 하고, 제2독회에서는 헌법안의 조문에 대하여 하나씩 축조심의를 하고, 마지막 제3독회에서는 내용을 정리하고 자구를 수정하는 방식이었다. 7월 12일까지 3독회를 모두 마친 후 헌법안을 확정하였고, 7월 17일 국회의장인 이승만은 국회에서 헌법안에 서명하고 공포하는 행사를 가졌다.
(1) 유진오의 「제1회 초고」(1948년 4월)
유진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헌법초안을 「제1회 초고」라고 적고 있고, 그 작성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7년 가을부터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조선법전편찬위원회의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 해 겨울방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헌법을 집필했다. 그러던 중 1948년 1월경에 황동준(黃東駿), 윤길중(尹吉重)을 추면으로 우연히 만났다가, 2월 하순부터 이들의 협력을 얻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전문(前文)을 포함한 전문(全文)이 이미 수차례 개서(改書)되었을 때였지만, 이들의 협력은 큰 도움이 되었고, 3월 하순경, 정윤환(鄭潤煥) 판사도 자주 그의 집에 와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948년 5월 초 그간 작업해 온 초안을 최종 손질해서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했는데, 이때 전문(前文)을 빼고 본문만 제출하였다. 그 까닭은 본문은 명확한 토론의 대상이 되기 쉽지만 전문(前文)은 이론(異論)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그 이론을 간단하게 조정하는 방법도 없기 때문이었으며, 본문 내용이 달라지면 전문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고려되었다.
註03
이상의 회고에서 황동준, 윤길중, 정윤환 등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고 하는 초안이 제1회 초고이다. 「제1회 초고」라는 제목 바로 아래에 작성 날짜가 1948년 4월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헌법 초안의 조문 끝에는 유진오가 참조한 각국 헌법안이 적혀 있는 조문이 있는데, 독일 바이마르 헌법, 미국, 오스트리아, 일본(대일본제국헌법과 일본국헌법), 중화민국, 필리핀, 프랑스, 프로이센 헌법 등이다.
유진오의 「제1회 초고」에는 수정 가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최종적으로는 10장 124개의 조문으로 구성되었다. ‘제1회 초고’의 구성은 조선임시약헌을 기본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경제제도, 지방제도, 헌법개정을 별개의 장으로 두는 방식을 취하였다. ‘제1회 초고’의 편제에 전문(前文)이 존재하였고, 제1장 총강(總綱), 제2장 인민의 기본적 권리의무, 제3장 국회, 제4장 정부 (제1절 대통령, 제2절 내각, 제3절 행정각부), 제5장 법원, 제6장 경제제도, 제7장 재정(財政), 제8장 지방제도, 제9장 헌법개정, 제10장 보칙(補則)으로 구성되었다. 이 초안에서 국호는 ‘조선민주공화국’으로 하였고, 제5조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강조하였으며 자유보다 평등을 먼저 규정하였다. 정부형태에 있어서는 내각책임제를 구상하였고, 대통령과 부대통령은 양원제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법원이 아닌 헌법위원회가 위헌법률을 심사하도록 하였다는 특징을 가진다.
(2) 유진오의 「헌법초안」(1948년 5월 사법부에 제출한 안)
유진오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진오가 작성하거나 참여한 헌법초안은 4가지가 있다. 첫째가 「제1회 초고」(1948년 4월 작성), 둘째가 이 초안을 정리하여 1948년 5월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헌법초안」, 셋째가 행정연구위원회와 함께 작성한 「한국헌법」(연구자에 따라 공동안 또는 합작안이라고 부르기도 함), 넷째가 유진오가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것으로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하여 본회의에 상정한 「대한민국헌법안」이다. 이 가운데 둘째가 사법부 제출안으로 부르는 것이다.
1948년 5월 초 유진오가 사법부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초안의 원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표지의 명칭은 ‘헌법초안’이고 표지를 제외한 총 17쪽의 등사물로 되어 있다. 자료의 표지에는 “1948년 5월 사법부에 제출한 안”이라고 쓰여 있다. 이 「헌법초안」(=사법부 제출안)의 조문 순서나 내용은 「제1회 초고」와 거의 일치한다. 헌법안의 편제는 제1장 총강, 제2장 인민의 기본적 권리의무, 제3장 국회, 제4장 정부(제1절 대통령, 제2절 내각, 제3절 행정각부), 제5장 사법(司法), 제6장 경제제도, 제7장 재정(財政), 제8장 지방제도, 제9장 헌법개정, 제10장 보칙(補則)으로, 총 10장 115조로 되어 있다.
(3)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의 「한국헌법」(1948년 5월)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는 1948년 5월경 공동으로 「한국헌법」을 작성하였다. 이 헌법안은 『국회보』 제20호(1958. 7)에 수록되어 있으며,
註04 제목은 ‘한국헌법’으로 되어 있다. 수록 당시 근거가 된 원 자료는 장경근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록 당시 회고에 따르면 이 헌법안은 1948년 5월 14일부터 제헌국회가 열리는 31일까지 18일 동안 기초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김용근, 노용호, 신익희, 유진오, 윤길중, 이상규, 이상기, 장경근, 차윤홍, 최하영, 황동규 등이다.
註05 행정연구위원회 위원들과 유진오는 각각 자신들이 작성한 헌법초안을 이미 갖고 있었다. 즉 행정연구위원회는 1946년 2월경 자신들이 기초한 한국헌법을 갖고 있었고, 유진오도 사법부에 제출한 헌법초안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헌법안 작성을 위해 함께 모여 각자 갖고 있던 두 헌법안을 종합하여 하나의 안으로 작성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학계에서는 작성 주체가 행정연구위원회와 유진오가 합작한 점에 주목하여 ‘공동안’ 또는 ‘합작안’으로 부르기도 한다.
註06 다만, 이 안이 어느 헌법초안을 중심으로 작성되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각 당사자들의 회고와 진술이 서로 다르다.
공동안은 총 10장 108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前文)이 등장하였고, 제1장 총강, 제2장 인민의 권리의무, 제3장 국회, 제4장 정부(제1절 대통령, 제2절 내각, 제3절 행정각부), 제5장 법원, 제6장 경제, 제7장 재정, 제8장 지방자치, 제9장 헌법개정, 제10장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동안의 편제와 내용을 볼 때 사법부 제출안의 내용이 많이 관철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법부 제출안과 행정연구위원회안 중 어느 하나를 기본으로 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호는 ‘한국’으로 하였다. 정부형태에 있어 유진오의 사법부 제출안과 행정연구위원회안은 모두 국회는 양원제,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로 했었다. 다만, 공동안은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대신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국무총리와 내각의 권한도 강화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또한 공동안은 재판관의 임기 조항을 없애고 대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을 부여하는 등의 특징을 보인다. 경제 관련 조항은 행정연구위원회안과 비슷한 점이 많고 다만, 적산 국유 조항, 농지개혁 조항, 국민경제회의 조항 등은 사법부 제출안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 처벌에 관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안은 1948년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에서 헌법안 마련을 위한 심의를 진행할 때, 심의 원안이 되었다.
(4) 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의 「헌법초안」
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 헌법초안은 흔히 권승렬안으로 불려왔다. 그 이유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안을 작성할 때, 당시 사법부 법제차장이었던 권승렬이 제출한 헌법안을 참고안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 안의 표지에는 명칭이 「憲法草案」으로 되어 있고, “法典編纂委員會 憲法起草分科委員會案”(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안)이라고 부기되어 있다. 헌법초안이라는 표지 명칭 옆에 “所爲 「權承烈案」”이라고 쓰여 있고 우측 상단에 “兪鎭午”라고 쓰여 있는데, 모두 유진오 자신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안의 실제 작성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표지에 적힌대로 법전편찬위원회가 작성한 것인지(이른바 공식안) 아니면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인 권승렬이 주로 작성한 것인지(이른바 사안)에 관한 것이다. 이인(李仁)은 당시 사법부 법전편찬위원회에서는 내각책임제안, 대통령중심제안, 절충안 총 3가지를 작성했다고 회고하였는데, 이 안이 아마도 절충안 또는 절충안을 수정한 안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권승렬안은 사법부 헌법기초분과위원회에서 작성한 ‘헌법개정요강’보다 유진오안이나 공동안과 유사한 부분이 많고 권승렬의 개인적 의사가 반영된 부분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권승렬의 개인적인 안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물론 유진오안이나 사법부 법전편찬위원회 작성 헌법안들이 권승렬안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註07
이 헌법안은 총 10장 135개조로 구성되어 있고, 전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편제는 제1장 총칙(總則), 제2장 국민의 권리의무, 제3장 입법, 제4장 정부 (제1절 대통령, 제2절 국무회의, 제3절 행정각부), 제5장 사법(司法), 제6장 재정(財政), 제7장 경제제도, 제8장 교육제도, 제9장 지방제도, 제10장 보칙(補則)으로 되어 있다. 편제는 유진오의 ‘사법부 제출안’과 유사하지만, 6장과 7장의 순서가 바뀌었고 교육제도를 별도의 장으로 구성한 것이 다르다. 권력구조에서는 내각책임제를 취하고 있지만, 유진오의 ‘사법부 제출안’보다 국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한 특징이 있다.
이 안은 1948년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에서 헌법안 마련을 위한 심의를 진행할 때, 참고안이 되었다.
(5) 「헌법 (초안)」(헌법기초위원회 3독회 심의안, 1948.6.18)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3일부터 회의를 통해 국회 본회의에 상정할 헌법안을 작성해 갔다.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의 ‘한국헌법’(이른바 공동안)을 원안으로, 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 헌법초안(이른바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새로운 헌법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헌법기초위원회는 3독회 과정을 통해 최종 헌법안을 확정해 나갔다. 이 안은 헌법기초위원회 3독회 심의를 위해 작성된 안이다. 그러니까 2독회까지의 논의 결과가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3독회 직전의 과정에서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결정된 내각책임제 정부형태가 이승만의 주장에 의해 대통령제로 변경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당시 헌법기초위원회의 논의 과정은 속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과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헌법기초위원회의 2독회 이후 3독회 사이의 과정은 유진오의 회고록과 당시 신문기사, 그리고 유진오의 유족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여 소장되어 있는 헌법초안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안은 당시 한민당의 조헌영이 가지고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심의안으로 쓰였던 헌법초안으로, 현재 유진오 가족의 기을 통해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표지의 명칭은 憲法(草案)이고, 표지를 제외한 본문이 24쪽으로 등사되어 있다. 표지의 憲法(草案)이라는 명칭 옆에 “國會憲法起草委員會에서 趙憲泳議員이 가지고 쓰던 草案, 趙芝薰 敎授로부터 借用”이라고 유진오가 써 놓았다. 조지훈 교수는 조헌영 의원의 아들이다. 헌법안에는 당시 조헌영 의원이 연필로 헌법조문 내용을 가감・삭제한 흔적이 남아 있어 3독회의 논의 과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憲法(草案)은 총 10장 105조로 되어 있고, 장의 편제는 제1장 총강(總綱), 제2장 국민의 권리의무, 제3장 국회, 제4장 정부 (제1절 대통령, 제2절 국무원(國務院), 제3절 행정각부), 제5장 법원(法院), 제6장 경제, 제7장 재정(財政), 제8장 지방자치, 제9장 헌법개정, 제10장 부칙(附則)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편제는 장과 절의 용어가 일부 바뀐 것이 있지만 이른바 공동안과 유사하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에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전문도 토론한 것으로 적고 있지만, 3독회 심의안에서는 전문이 누락되어 있다. 아마도 전문은 본문에 관한 논의가 완료된 후 다시 검토하기로 하고 3독회에서는 유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 헌법안의 고려대 소장본을 살펴보면, 연필로 조문의 문장이나 용어를 수정한 표시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연필로 조문 전체를 삭제하거나 새로운 조문을 부가해 놓은 표시가 있다. 조문 전체를 삭제한 경우는 원안 35조(국회 해산과 총선거 규정), 57조(대통령의 국회 해산 규정), 72조(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국회에 대한 책임 규정). 73조(국회의 국무원 불신임 결의 규정) 등이고, 조문 전체를 거의 수정한 경우는 원안 69조(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의 승인 규정), 70조(국무총리의 국무원 수반 규정) 등이다. 이러한 조문의 삭제나 수정은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변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문을 새로 추가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진오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고집하자 6월 21일 밤 김성수의 집에서 30명 가량이 모여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대통령제로 바꾸었는데, 김준연이 연필로 개필(改筆)해 넣은 심의용 초안유인물을 들고 유진오에게 앞뒤 의미가 통하는지 물었다. 유진오가 훑어보니 35조, 57조, 72조, 73조 등을 삭제한 것 외에도 국무총리 임명에 국회의 동의를 얻게 한 것과 국무위원 임명에 국무총리의 제청을 요하게 한 것을 삭제하고 기타 몇 조문의 문구를 가감수정한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수정된 안이 3독회 심의를 거쳐 확정되었고, 대한민국 헌법안으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게 된다.
(6) 「대한민국헌법」(1948.7.17.)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작성을 완료한 「대한민국헌법안」은 6월 23일 제17차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헌법안을 상정하고 나서, 조헌영 의원의 헌법안 낭독,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서상일 의원의 헌법의 유래, 논쟁이 되었던 사항에 대한 설명, 전문위원 유진오에 의해 헌법의 기본정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제1독회 진행 과정에서는 국호, 인민과 국민의 차이, 정부형태, 국회구성 문제 등에 대한 많은 토의가 있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부형태를 대통령제로, 국회 구성을 단원제 등으로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제2독회에서 논의된 주요 사항은 헌법 전문의 수정, 신체의 자유 조항, 교육 관련 조항, 근로자의 이익균점권과 경영참가권, 국회 구성, 대통령 선출방식, 국무총리 임명시 국회 동의, 대법원장 및 대법관 임명시 국회 동의, 농지와 산림분배, 반민족행위자 처벌, 적산 처리 문제 등이었다.
1948년 7월 7일 제2독회가 끝난 뒤, 7월 12일 오전 국회의장 이승만의 사회로 제3독회가 진행되었다. 3독회는 신속하게 진행되어 제103조까지 모두 낭독한 후, 기립으로 통과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고 이승만은 헌법안의 전원일치 통과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은 7월 17일 국회의장 이승만이 서명, 공포하였다. 현행 헌법 전문에서 1948년 7월 12일을 제정일로 한 것은 헌법이 제헌국회를 통과한 날 확정되어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은 전문 10장과 전체 103개의 조로 구성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였다.
둘째, 국민의 기본권을 체계적으로 폭넓게 보장하였다. 자유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신체의 자유에서 치안유지를 고려하였다. 기본권의 내용을 자유권에서 사회・경제권으로 확대하였고,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을 명시하였으며, 생활무능력자의 보호, 가족의 건강보호 등 사회적 기본권이 규정되었다.
셋째, 경제 질서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수립’을 2대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넷째, 국회는 임기 4년제의 단원제로 하고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로 하되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헌법 초안은 의원내각제 중심이었으나 논의과정에서 대통령제로 변경되었던 것인데, 권력을 대통령과 의회가 분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1차 중임을 허용하였다.
다섯째, 법원의 구성에 있어 사법권독립을 위해 대법원장인 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도록 하였다. 대통령·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 등의 직무수행에 관하여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결의할 수 있도록 하고, 탄핵사건을 심판하기 위하여 탄핵재판소를 설치하였으며, 법률의 위헌심사권은 헌법위원회에 부여하여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진 헌법위원회와 탄핵심판을 담당하는 탄핵재판소를 따로 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