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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제 : 미소공위 답신서로 보는 주요 단체의 국가건설 방안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을 중심으로 헌법과 여러 입법 논의가 진행되고, 정치적으로 다양한 정부수립 방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던 중 5월 21일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됨에 따라 이를 중심으로 한 통치구조와 정책수립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한반도에 민주주의적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남북한에 소재하고 있는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의 견해를 청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435개 정당 및 사회단체가 답신안을 작성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 자문서는 6월 12일에 발표된 공동결의 제5호와 제6호에 따른 것으로 구분된다. 우선 결의 제5호에서는 앞으로 수립될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관한 문의사항 6항목으로 민권, 임시정부의 일반적 형태 혹은 성격, 행정 및 입법기능을 수행할 중앙정부의 기능, 지방정권체의 구성조직권한 및 책무, 사법기관, 임시헌장수정 및 첨삭(개정)의 방법 등에 대해 물었다. 결의 제6호에서는 앞으로 수립될 임시정부의 정책자문에 관한 문의사항으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책(공민권, 일제영향의 잔재숙청 등), 경제정책(토지소유정책 포함), 산업조직, 노동․임금․사회보험, 통상과 물가, 재정, 교육 및 문화정책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자문서에는 외교, 국방, 적산 등의 문제가 누락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의해 수립될 임시정부의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된 답신안 중 의미 있는 답신안들은 『임시정부수립대강』에 수록된 답신안들이다. 여기에는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의 답신안, 좌파세력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작성한 민전의 답신안, 좌우합작노선인 시국대책협외회의 답신안, 우익세력과 중도세력이 결합되어 만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답신안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먼저 답신안이 작성되고,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시국대책협의회는 이를 본 후 자기들의 구상이 담긴 답신안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좌파를 제외하고서는 정부형태 구상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특히 연방제를 배제하고 단일국가제를 택한 점은 세 가지 답신안이 동일하였고, 정부형태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혼합제정부의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대통령에게 상대적으로 강한 권한을 부여하여 대통령제를 지향한 점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수립에 있어서 총선거 또는 대표자협의회 방식의 여부, 선거권을 부여하는 연령, 사법제도에 있어 배심제도와 인민재판의 채택 여부, 지방자치단체 장의 선임 방식, 토지개혁의 대상이 되는 토지의 범위, 계획경제의 채택 여부, 친일파 처벌의 문제 등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대표단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사회단체만을 협의의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굽히지 않았고, 미국 대표단은 이를 정치적 의사표시의 자유로 보면서 협의 대상을 넓히고자 하였다. 한편 미군정이 불법적 파괴활동을 자행하던 남로당과 좌익계의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인 검거를 하자 이에 대해 소련이 강경하게 항의하면서 어떤 합의도 도출되지 못했다. 결국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 없이 끝이 났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넘겨 처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사실상 좌절되었다. 남북한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 제정 논의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1) 입법의원의 답신안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답신안은 신익희를 중심으로 미소공동위원회대책위원회에서 작성하였다. 동 위원회는 民選의 申翼熙, 李琮根, 金度演, 徐相日, 崔鳴煥(이상 5인)과 官選의 金乎, 張子一, 黃信德, 金法麟, 朴建雄(이상 5인)으로 구성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1947년 6월 23일 입법의원 본회의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대책위원회가 기초한 전문 초안이 상정되어 토의되었다. 이 안의 특징은 입법의원에서의 입법 활동의 성과를 반영하였고 우파와 중간파의 헌정구상이 절충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답신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의 구성은 연방제는 배격하고 단일국가 정부를 채택한다. 총선거를 통해 국회와 임시정부를 구성한다.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를 지향하였고, 대통령과 부대통령은 전국을 한 선거구로 하여 보통, 균등, 직접, 비밀투표의 방법으로 선출한다(임기 2년, 3선 금지). 대통령은 법률안 제출권과 법률안 거부권을 갖는다. 의결기관으로서 국무위원회를 두었다. 국회는 단원제로 하고 임기를 2년으로 예정하였다. 국민의 권리(민권)로 자유권, 재산권, 선거권(22세 선거권), 평등권, 국가기관에 관한 권리 등으로 체계화하였고, 교육문화정책에서 초등의무교육과 균등한 교육의 기회 등을 강조하였다.
경제정책에 있어 토지개혁의 실시, 농민본위의 토지재분배, 농민착취의 폐해 일소, 자경자농의 원칙, 일본인 소유의 토지 몰수 등을 규정하였다. 생산과 분배는 계획경제체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최저임금제도 실시, 1일 8시간, 1주일 48시간제, 노동조합법 제정 등을 규정하였다.
(2)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임협)의 답신안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임협)는 미소공위 협의에 참가를 신청한 우익 단체들의 협의체 조직이다. 처음에는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반대하다가 이후 입장을 변경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소련 대표단은 임협에 소속된 일부 단체의 반탁운동을 문제삼아 이들을 협의에서 제외할 것을 미국에게 요청하였다. 임협은 사실 한민당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남한 우익의 견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임협은 1947년 7월 1일 한민당 회의실에서 정당, 사회단체대표 170여명(그 중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단체 140단체)이 출석하여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할 건의서를 통과시켰다.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답신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는 남북한 총선거에 의하여 대통령과 부대통령을 선출하여 구성한다. 대통령으로 하여금 내각을 조직하고 임시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게 한다. 임시정부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에 가깝다. 임시대통령의 임기는 정식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로 하였다. 국무총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으며 국무위원회 수반으로 행정각부를 통괄한다. 대통령은 법률안 제출권과 거부권을 갖는다. 법제위원장, 고시위원장, 감찰위원장 뿐만 아니라, 경제계획원장과 기술원장을 두고 있다. 법원은 3심제를 채택하였다.
국민의 권리(민권)는 생명보장의 기본권, 자유권, 재산소유권, 국가기관에 대한 요구권, 참정권, 평등권으로 구분하고 있다. 권리 부분은 입법의원의 답신안 이외에 이른바 민주의원안도 참고하여 작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경제정책에 있어 국가의 계획과 통제정책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토지제도 개혁은 자경자농의 원칙하에 적산토지와 정부에서 매상한 대중지주의 토지를 경작농민에게 유상분배하도록 규정했다. 원칙적으로 농경지는 농민 소유로 하고 소작제를 철폐하도록 하였다. 산업운영은 개인의 창의를 존중하고 노자협조 정신을 기본으로 하되, 산업 전체에 대한 국가의 계획통제정책을 수립하도록 하였고, 산업 발전을 위해 자본기술물자 및 노력을 총동원하되 경영체는 산업 특수성에 따라 국영, 공영, 사영, 영단 등을 선택하도록 했다.
(3) 시국대책협의회(시협)의 답신안
시국대책협의회(시협)는 좌우합작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중간파의 견해를 대표한다.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위원회도 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1947년 7월 3일 시국대책협의회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근민당과 민주주의독립전선에서도 개인적으로 참여하였지만 합작위원회안과 거의 같다는 점에서 시협의 안은 좌우합작위원회의 안과 동일시해도 될 것이다.
시국대책협의회 답신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의 구성은 미소공동위원회 대상의 각 정당․사회단체가 대표자협의에서 산출하는 것으로 하였다. 임시정부의 자주권을 강조하고, 미소공동위원회 대상의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로 임시입법권을 대행하는 것으로 하였다. 임시정부는 수립 후 최소 6개월, 최대 1년 이내에 정식정부의 수립하도록 하였다.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전국단위의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부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되, 임기는 2년으로 하고 연속 3선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대통령직속 하에 국가결의기관으로 국무위원회를 두고, 국무총장이 위원장이 된다. 국무총장과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되 국회의 인준을 요한다. 대통령은 법률안 제출권뿐만 아니라 거부권도 갖는다. 행정집행을 보좌·감시하는 법제·고시·감찰기관을 특별히 설치한다. 국회 구성과 임기는 입법의원과 동일하다. 국회는 행정 각 기관의 위법행위에 대하여 탄핵을 의결할 수 있다. 사법부는 3심제를 채택하였다. 최고법원의 장과 법관의 임명에 있어 10년마다 국민심사를 받도록 하였다. 배심제와 인민재판제도를 수용하고 있다.
국민의 권리(민권)는 입법의원 답신안과 같은 체계로 되어 있다. 선거권 연령을 20세로 하였고, 부일부역자와 친일파 등의 임시정부 참여 제한을 분명히 하였다. 재산권에 대해 사회이익과 조화되어야 하며 정당한 보상의 전제하에 공공복리를 위해 사유재산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의 자유 보장의 목적보다는 전체가 실제 생활에 균등해지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 더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제에 있어 토지개혁 실시, 농민본위의 경작권 확립, 농민의 최고한정면적(1호당 3정보) 설정 및 자유처분권 제한, 일본인의 토지 전부 몰수, 토지의 무상 분배, 토지의 국유 및 농민에 게 영구사용권 부여, 소작인 철폐 등을 규정하였다. 지주의 토지도 토지개혁의 대상으로 하였다. 생산과 분배는 계획경제체제를 원칙으로 한다. 대산업의 국가경영, 중산업의 관민합변(官民合辨), 소산업의 사유·사영을 원칙으로 하였다. 최저임금제, 1일 8시간 1주 48시간제, 노동조합법 제정 등을 규정하였다.
(4)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답신안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남한 지역에서 좌파를 중심으로 과도정부 수립 또는 헌법안 작성을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1946년 초에 이미 허헌을 중심으로 헌법안 작성을 시도한 바 있다. 민전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주장하였고, 미소공동위원회 시기 민전의 온건파 일부는 좌우합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민전의 산하단체는 70여개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답신안은 남로당, 북로당, 북조선민전 등도 제출하였으나, 남로당의 답신안은 민주주의민족전선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북로당은 북한 좌익의 견해를 대표한 것인데, 남로당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답신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답신안은 평등권을 제일 우위에 두고 “성별, 재산, 사회출신, 교육, 신앙 등 불구하고 절대평등”이라는 규정을 두고 있다. 선거권은 20세로 규정하고, 초등교육을 받을 권리와 근로의 권리를 둔 것이 특징적이다. 이에 반하여 재산권에 관한 규정은 두지 않았다.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 국체는 민주주의적 인민성격 정부이다. 민전이 삼권귀일제를 주장하였고 이것은 곧 인민위원회가 입법․사법․행정 3권을 모두 행사하는 최고권력기관이 된다는 것이었다. 민전의 답신안에서는 정부형태와 관련하여 “대통령을 단독제기관으로 하여 거기에 권력을 모다 집중시키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으로 보아도 올치 않을 뿐 아니라 현실의 조선에는 더욱 타당치 않다”라고 하여 대통령제를 반대하고 있(새한민보사편 1947, 43)다. 또한 ”조선 인민의 총선거가 실시되기까지는 대통령제 또는 주석의 제도를 채용치 말고 수상 또는 무수상회의제도를 채용하며 각부는 그 책임자와 부책임자의 회의결정제도를 채용하고 내각회의에 최대의 구성을 부여하는 제도를 채용하여야 한다“고 하여(새한민보사편 1947, 104),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구성보다 인민위원회제도가 개인의 권력 전횡을 막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다 우월한 것으로 주장했다.
경제 구상과 관련하여 표명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경제정책’은 국유화 및 공유화를 핵심적인 경제원칙으로 삼았는데, 이는 당시의 경제요건 하에 국가만이 대규모 자본과 기술의 동원이 가능하다는 인식에 기반하였으며, 적산 처리를 위한 것이었고, 개인의 경제 독점・집중을 막기 위한 정책을 의미했다. 토지소유정책에 관하여 식민지 시대에 행했던 일체의 지주의 토지소유 및 소작제도 철폐와 토지의 소유 및 이용권을 농민이 가지도록 하였으며, 조선인 지주의 토지는 무상몰수를 규정하였다. 산업의 소유권에 관하여 대산업(철강화학공업)은 국유, 중산업(섬유, 제화)은 국유 또는 공유, 소산업(가구, 농구)은 모두 사유로 하고 일부만 공유로, 은행 보험업은 국유, 도매업은 국유 또는 공유, 소매업은 사유 또는 공유, 광물(지하자원) 삼림, 철도, 선박회사, 공리기관(예: 전력, 수도, 통신기관), 대어업은 전부 국유, 소어업은 사유 또는 공유로 할 것으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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